The Beginnings, Independent Missionaries
한 알의 밀알이 된 독립선교사

Vision Fellowship Vision
1888년부터 조선 땅에 복음을 전파한 캐나다 선교사들의 이름과 얼굴들을 통해 그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우리도 세계를 향해 복음을 비추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Visionfellowship Museum
내한 캐나다선교사 전시관
130년전 조선인 보다 더 조선을 사랑했던 180여 분의 내한 캐나다 선교사님들의 헌신과 사랑의 사역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10개의 색션으로 일목요연 하게 정리되어 있다.

The Pioneers – Official Canadian Missionaries
최초의 캐나다 파송 선교사
Growing Prosperity
놀라운 성장
The Great Revival Movement
The Great Awakening
원산, 평양 대부흥
3.1 Independence Movement
3.1독립운동과 함께
The Effects of Japanese Colonization on Mission
일제치하에서도 식지 않은 선교의 불길
원산 부흥운동(1903~1907)과 평양 대 부흥운동(1907)
1903년 한국 교회의 역사에 위대한 한 획을 긋는 신앙체험이 원산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체험은 들불처럼 번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고, 그 후 전국적으로 파급되면서 백만인구령운동으로 발전하여 한국교회에 커다란 발전과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원산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맥컬리와 화이트, 두 여 선교사의 기도모임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12명이 선교사들이 일주일간 사경회를 열기로 했다. 이 기도 모임은 중국선교사였던 화이트 선교사를 통해 의화단 사건(중국인들의 백인 배척사건)을 전해 듣고 선교활동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강사로 초청된 하디 선교사는 성령의 뜨거운 감동을 통해 자신의 침체된 선교활동이 자신의 교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원산감리교회 성도들 앞에서 공개적인 회개를 하였다. 이를 통해 서로 통회자복하고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되면서 조선 땅은 서서히 성령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맥켄지 선교사의 순교는 약혼녀였던 맥컬리의 눈물의 기도로 이어지고, 하디의 회개로 말미암아 세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진 것을 보면 한 알의 밀알이 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된 성경말씀이 성취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게 된다.
럽(Robb) 선교사가 여기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럽(Robb) 선교사는 황해도 해주에서 맥켄지 선교사가 순교했을 때 서경조가 편지를 캐나다장로교단에 보냈고, 이 편지를 파인힐 신학교 교지에 실었던 분이다. 이 분도 그리어슨, 하디, 맥레와 함께 조선 땅으로 갔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럽 선교사도 하디의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거듭나게 되었다. 며칠 동안 금식하고 거리를 돌아 다니며 기도했다. 많은 사람들은 술 취했다고 조롱했으며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나 그는 하디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부흥운동의 동역자가 되었다.
그리어슨은 목회자이면서 제동병원 의사였다. 마틴은 용정 제창병원 의사였다. 바커는 용정선교부 선교사였다. 스코필드는 세브란스 병원의 의사였다. 이 네 분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3.1운동의 독립 유공자들이다.
3.1운동에 대한 미국 선교사와 캐나다 선교사들의 태도가 다르다. 왜냐하면 미국은 일제와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었기 때문에 일본의 조선 지배에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 따라서 미국 선교사들은 독립운동을 직접적으로 지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자유로웠던 캐나다 선교사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도왔다. 그리어슨은 일본을 하나님의 뜻에 대적해 일어난 사탄의 앞잡이로 지탄하며 설교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독립정신을 고취 시켰다.
그리어슨은 성진에서, 바커와 마틴은 용정에서, 스코필드는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돕는데 병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외국인이 세운 치외법권 지대인 병원은 일제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활용했다. 독립운동 물밑작업을 하도록 도와주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한편, 독립운동가들을 숨겨 주기도 해 선교사들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성진에서 만세운동 다음날 전교인이 감옥에 갇히자 그리어슨은 오랫동안 종을 쳐서 감옥에 있는 교인들이 종소리를 듣고 힘을 얻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바커와 마틴이 도와준 용정의 만세운동은 만명 이상이 모여 역대 만세운동 가운데 규모가 제일 컸다.
스코필드는 세브란스 병원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3.1운동의 민족대표가 33인인데, 스코필드 박사를 포함 34인이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깊이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특히 제암리 학살사건을 포함, 일제의 만행을 사진으로 찍어 세계에 타전해 널리 알렸다.
캐나다의 한인들은 스코필드 박사의 업적을 기려 2011년 토론토 동물원에 이 분의 동상을 세웠다. 동상 제막식에는 전 국무총리 정운찬 씨가 방문했는데, 이 분을 포함 고 김근태 씨 등이 그 분의 제자이기도 하다.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일제의 잔악한 압제는 도를 더 해갔고 모진 핍박 속에서도 캐나다 선교사들의 사역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플로렌스 머레이
플로렌스 머레이(Florence J. Murray)는 27세의 나이에 처녀의 몸으로 조선에 와서 제 1대 맥밀란이 순교한 함흥 제혜병원의 2대 원장으로 섬겼다.
머레이는 목사의 딸로 태어나 목사가 되려고 했으나 당시 여성안수는 허락을 안했으므로 의료선교사로 방향을 전환했다. 달하우지 의대를 졸업, 의사가 되어 조선 땅을 밟았다. 후일 일제에 의해 추방 당했다가 6.25 전쟁 후 다시 한국으로 갔으나 3.8선에 가로막혀 북한으로 가지 못하고 원주에 병원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원주 기독병원이다.
머레이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한국을 제 2의 조국으로 삼고, 사랑하고 섬겼다.
아다 센델은 함흥 제혜병원에서 머레이와 함께 사역했던 간호사다.
일제의 핍박 아래
일본제국주의의 핍박이 점점 심해지면서 1941년에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 당하게 된다. 이때에 남은 머레이, 스코트, 블랙, 번즈 등의 선교사마저도 이듬해 모두 추방 당하게 되어 캐나다 선교사들의 사역은 공식적으로 1941년을 기점으로 종료된다. 추방 당한 선교사들은 만주, 중국, 인도, 일본 등으로 가서 사역을 계속하거나 캐나다로 돌아 갔다 6.25전쟁 이후에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Dr. Hall Family
닥터 홀 가족
닥터 홀의 가족은 아버지 윌리엄 홀(William James Hall), 어머니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그리고 셔우드의 아내 메리안 홀(Marrian Bottomly Hall)의 의사 네 명을 말한다.
내한 캐나다선교사전시관을 세운 최선수 장로는 우연한 기회에 아들 셔우드 홀이 소천하기 얼마 전에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최 장로가 황해도 해주 출신인 것을 알고 “한국 축복, 한국 축복”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의 사역지가 황해도 해주였기 때문에 더 친근하게 여겼을 수도 있다. 이를 계기로 부인이었던 메리안과 그의 딸 필리스를 만나게 되었고 닥터 홀과 메리안이 소천 한 후에 그들로부터 받은 자료를 토대로 전시관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설립동기 참조)
닥터 홀 가족(Dr. Hall Family)



아버지 윌리엄 홀&
어머니 로제타 홀
미국인이었던 로제타가 먼저 조선 땅을 밟게 되었고(1890) 캐네디언인 윌리엄은 이듬해(1891) 입국을 했다. 둘은 조선에서 결혼한 최초의 서양인이 되었다. 로제타는 서울에서 사역했고, 윌리엄은 평양으로 가 선교지 터를 잡았다. 윌리엄은 “하나님, 만약에 복음의 문이 열리는데 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제가 희생하겠습니다”라고 서원했는데 기도대로 순교하게 된다. 청일전쟁에 평양에서 벌어졌고 위험하니 모든 선교사들은 피신하라고 했지만 윌리엄은 끝까지 남아 상처입은 환자들을 돌보다가 열병에 걸려 순교하게 된다.
윌리엄이 순교 할 때 셔우드는 돌이었고 로제타는 임신 7개월이었다. 남편의 순교로 충격을 받은 로제타는 윌리엄과 함께 친정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 갔다. 돌아 갔지만 남편을 묻은 조선에 대한 마음을 잊지 못하다가 1897년 친척들의 후원으로 닥터홀기념병원(기홀병원)을 세우고, 본인도 자녀들과 함께 1898년 다시 돌아 왔다. 배 안에 있던 아기는 에디스로 남편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디스는 조선에 온지 6개월 뒤 이질로 사망하게 된다. 사랑하는 남편도 딸도 양화진에 묻은 로제타는 불행에 굴하지 않고 한국을 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 박에스더라는 조수를 미국에 데리고 가 최초의 한국인 여의사로 만들었다. 또 특수교육의 선구자로 맹인들을 위한 점자책을 최초로 만들었고, 최초의 여성의료 교육기관인 경서여자의학교를 설립했는데 훗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며, 동대문 릴리언 해리스 병원에서 사역했는데 훗날 이화여대 의대 부속병원이 되었다.
셔우드는 원래 사업가가 되려고 했다. 열두살 되던해 평양에서 열린 평양대부흥집회였던 1907년 1월 하디의 집회에 참석하여 감동 받고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토론토의대를 졸업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갔다. 황해도 해주 구세병원에서 의료사역을 한 셔우드는 한국의 결핵 퇴치를 위한 기금마련을 위해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보급했다.
조선은 결핵이 만연되어 희생자들이 속출했는데 셔우드는 이 결핵퇴치를 위해 헌신했다. 그 이유는 로제타가 여의사로 키운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숨진데 대한 충격 때문이었다. 셔우드는 어려서부터 박에스더를 이모처럼 여기고 따랐는데 돌연 결핵으로 쓰러진데 대해 조선의 결핵 퇴치에 앞장 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윌리엄 홀 당시 조선인 김창식 목사가 동역했고, 아들 셔우드 홀 사역 당시에는 김 목사의 아들 김영진 의사가 사역해 부자가 2대에 걸쳐 동역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셔우드는 소천 7년전 결핵퇴치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결핵협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으로 나갈 때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는지 입고 갈 옷이 없을 지경이었다. 친구들이 마련한 양복과 메리안의 친구들이 마련한 옷 몇 벌을 가지고 부부가 한국을 방문 했다고 한다.
소천 직전 메리안이 기증한 비디오테이프(분실)과 ‘조선회상’ 초판본, 그리고 셔우드의 딸 필리스가 기증한 유품들이 본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아들 셔우드 홀과
아내 메리안 홀
사역지도
1890년 중국 선교사였던 존 네비우스가 선교지 분할정책을 입안하여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우후죽순 입국하여 중복 선교되는 것을 피하고자 하였다. 미국과 캐나다는 이 정책에 따라 미국은 평안남북도를 포함한 서부지역을 담당하였고 캐나다는 상대적으로 오지가 많고 험준한 지역인 함경남북도 지역을 선교지로 삼게 되었다. 성진에 그리어슨, 함흥에 맥레, 원산에 푸트가 각각 선교부를 설립했고 이들은 회령과 북간도(북만주) 일대의 용정지역, 연해주 지역까지 선교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평양에서 윌리엄 홀이, 황해도 소래에서 맥켄지가 순교했고, 소래에서 셔우드 홀이 사역을 했다. 소래는 비전펠로우십 설립자 최선수 장로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비전펠로우십과 서머나교회가 탁아소를 세운 곳이 나진 선봉지구의 굴포리이다.

선교역사
모든 선교의 출발점은 무디(D. L. Moodie) 목사의 부흥운동이다. 게일, 하디, 에비슨 등이 모두 무디의 부흥운동과 학생자원운동에 은혜를 받고 선교사로 자원하게 되었다.

유품전시실에는 셔우드와 메리안의 딸 필리스가 중정한 희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찬송가는 로제타가 아들 셔우드에게 선물한 것이고, 대한결핵협회 초청 때 받았던 각종 훈장, 감사장, 감사패, 기념메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셔우드의 아내 메리안에게 기증 받은 ‘조선회상’ 초판본과 아버지 윌리엄이 파송될 때 뉴욕의 한 교회에서 증정한 성경책은 아들 셔우드에게 물려진 130년된 것과 셔우드가 들고 다니던 왕진가방 등이 있다.
한편에는 케이트 맥밀란의 자필 편지도 있다.